다치바나 무네시게가 야나가와의 성주가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의 일입니다. 이후 다치바나 가문은 야나가와와 함께 역사를 만들어 왔습니다. 여기서는 다치바나 가문의 400년 역사 중 특히 중요한 5인의 삶과 함께 야나가와와 더불어 살아왔던 다치바나 가문의 역사를 소개합니다.
다치바나 무네시게(16~17세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센고쿠 무장이었던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야나가와성에 입성한 것은 1587년의 일이었습니다. 무네시게는 규슈의 봉건 영주인 다이묘 오토모 가문의 가신 중 하나였는데, 히데요시에게 무훈을 인정받아 다이묘로 등용되었습니다. 무네시게가 뛰어났던 것은 전투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뛰어난 위정자로서의 모습도 지니고 있어 야나가와 주민들의 신뢰도 두터웠다고 합니다.
무네시게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측에 가담하는 바람에 영지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무네시게는 유랑 생활을 경험하게 되는데, 도쿠가와 막부에서 도요토미 시대의 무훈과 그의 인품을 인정받으며 야나가와의 번주로 다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쫓겨났던 영지를 되찾을 수 있었던 다이묘는 다치바나 무네시게 단 한 명이었습니다.
다치바나 사다요시(17~19세기 에도 시대)
에도 시대 중기의 5대 번주 다치바나 사다요시는 교호 대기근 때, 막부에 급료를 요구하는 등 야나가와 주민들의 삶을 보살폈던 훌륭한 번주였습니다. 사다요시 시절에는 야나가와성의 바깥 성곽인 니노마루에서 첩실과 자제들의 거처를 야나가와성과 가까운 오늘날의 오하나로 옮겨 저택을 지었는데, 그후 사계절 꽃들로 물든 모습에서 '오하나바타케'(꽃밭)라는 애칭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상호인 '오하나'의 유래입니다.
다치바나 도모하루(19~20세기 메이지 시대)
메이지 시대, 무사 중심의 세상이 끝이 나면서 다치바나 가문은 백작 가문이 되었습니다. 다치바나 가문의 14대 당주 다치바나 도모하루가 오늘날 '오하나'의 기초가 되는 저택을 정비했습니다. 도모하루는 도쿄에서 수학한 농학 지식을 살려 지쿠고 지방의 농업 진흥을 위해 사비를 들여서 나카야마 농사 시험장을 조성했습니다. 시험장에서는 당시 아직 일본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세계 각국에서 모은 각종 과일과 야채의 씨앗으로 시험 재배를 실시했습니다. 이때 시험농장에서 탄생한 야채가 중국의 푸성귀와 일본의 붉은 갓을 조합한 '갓(미이케타카나)'입니다.
또한, 지역사회와의 연계를 소중히 여기며 야나가와 전체의 발전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습니다. 도모하루의 농업 진흥에 대한 노력은 아들인 15대 당주 아키노리로 이어지면서, 야나가와에서 원종이 발견되어 연구 중이었던 온쥬귤 '미야가와와세'를 보다 널리 보급하고자 모델 농원으로 연 것이 지금도 현존하고 있는 백작 가문 농장(깃코엔)입니다. '미야가와와세 생온쥬귤'은 이후 일본 전국대회에서 우승하며 장려 품종으로서 요정의 경영이 부진할 때도 오하나를 지켜주는 존재였습니다.
다치바나 가즈오와 아야코(전후)
1910년, 다치바나 백작 가문에서 태어난 아야코는 메이지, 다이쇼, 쇼와, 헤이세이라는 역사 속에서도 특히 변화가 극심했던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백작 가문의 영애로 하인들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하며 24세에 16대 당주가 된 가즈오와 결혼했습니다. 황실의 임야 관리를 맡은 '제실임야국'에서 근무하는 가즈오가 전근하면서 홋카이도와 기소에서 주부로서 생활했습니다. 전후, 작위를 지녔던 옛 가문들은 농지개혁 및 재산세, 상속세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다치바나 가문의 당주가 된 가즈오와 아야코는 야나가와로 돌아와 1950년에 구 백작 저택을 활용하여 요정업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이것이 바로 요정 료칸 '오하나'의 탄생입니다.
"영주님, 안주인께서 요정을 경영하다니요!"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야나가와 주민들. 당시 "영주님이 요정에 다니는 것은 당연하지만, 요정을 경영한다는 것은 들은 적도 없다", "실패한다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는 말들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야코는 타고난 밝은 성격으로 "어떻게든 될 거야"하며 가즈오를 격려하였고, 곁에 있어준 친척과 하인, 소개받은 사람들과 함께 분투하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경영이 안정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지금의 오하나는 야나가와 관광의 거점으로서 자리 잡으며, 봉건 영주인 다이묘의 문화를 오늘날에 전하는 문화시설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영지를 포기하고 20년 후, 다시 이곳 야나가와로 돌아온 초대 야나가와 번주 다치바나 무네시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작위 제도가 폐지되었음에도 이곳 오하나만은 포기하지 않고 요정 료칸으로서 경영을 시작하여 오하나를 후세에 남긴 16대 가즈오와 아야코.
이들 조상 대대로 유례없는 노력과 항상 오하나를 사랑해 주시는 여러분 덕에 약 300년이 지난 지금도 오하나는 다치바나 가문, 그리고 야나가와와 더불어 오늘날까지 역사를 써내려 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수로로 둘러싸인 7,000평에 이르는 모든 부지가 '다치바나 정원'이라는 이름으로 국가 명승에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쇼토엔', '서양관', '연회장', '거실', '가정국(사무소)', '문지기 대기소' 등 약 100년 전 백작 저택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근대 일본식 건축이자 일본에 현존 문화재로서 지금은 매우 보기 드문 존재입니다.
'사람, 그리고 문화가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는' 궤적을 되돌아보자면, 100년이 지난 먼 미래에도 오하나를 계속해서 계승해 나가고자 다시금 결심하게 됩니다. 저희들은 다치바나 가문의 이야기, 역사 그리고 문화재의 매력을 다양한 체험을 통해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장소로서 앞으로도 계속해 나아갈 것입니다.
현 대표 다치바나 가문 18대 다치바나 지즈카
100년. 많은 사람의 일생보다 긴 시간. 오하나와 관련된 사람들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계속 남아 있는 것을 다음 세대로 이어 갔습니다. 오디오 가이드로 돌아보는 것은 오하나의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다치바나 가문 5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문화재에 잠시 멈춰 서서 이 이야기를 들으며 '당신 자신이 100년 후에 계승해 나고 싶은 것'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는 오하나의 연회장에서 지난 날들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디오 가이드: 100년 후에 계승해 나고 싶은 것